[논평] 사법부는 여성혐오 사건을 ‘묻지마 범죄’로 덮으려 하지마라



사법부는 여성혐오 사건을 ‘묻지마 범죄’로 덮으려 하지마라



우리 사회는 수많은 여성대상 폭력과 범죄에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가? 2020년 5월 26일 낮 1시 50분경, 서울역 역사 1층에서 30대 여성이 신원을 알 수 없는 남성에게 폭행을 당해 광대뼈 골절을 포함한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해당 사건의 가해자는 6월 2일 철도특별사법경찰대에 의해 검거되었으나, 긴급체포 과정이 위법했다는 이유로 구속영장이 기각된 데 이어 재신청한 구속영장 역시 가해자의 조현병에 따른 우발적 범죄라는 이유로 또다시 기각되었다. 사법부는 이어 2020년 5월 30일 거창군 거창읍 한 도로에서 새벽 1시경 길을 가던 20대 여성을 무차별 폭행한 후 술에 취해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진술한 가해자에 대해 거주지가 명확하고 조사에 응하는 등 도주 우려가 없다는 사유로 구속영장을 기각하였다.


사건 이후, 피해자를 포함한 수많은 여성이 ‘과연 피해자가 남성이었어도 그러한 폭행을 당했었을까?’라고 물으며, 자신들이 대중교통이나 일상생활을 영위하며 당한, 많은 수의 크고 작은 ‘여성대상 묻지마 폭행’의 증언을 이어나갔다. 이는 한국 사회에서 여성에게 안전해야 마땅한 일상의 공간과 시간조차 남성 중심적 폭력의 행태와 여성혐오의 시선에 의해 속박되어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서울역 폭행은 단발성이거나 우발적인 ‘묻지마 범죄’라고 보기 어렵다. 이 사건의 가해자는 이전에도 동네 주민 여성을 폭행·협박한 전력, 불특정 여성 시민들을 폭행한 전력이 있다. ‘묻지마 범죄’의 정의가 범죄의 동기가 불분명하며 충동적이고 불특정 다수를 향한 범죄라면, 서울역 폭행 사건의 특징은 이와는 엄연히 다르다. 가해자의 여러 차례에 걸친 공격은 주로 불특정한 여성 시민을 향했다. 이는 그의 공격성이 주로 여성을 향한 물리적 접촉, 시선의 우위성 확보를 계기로 발현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말로 ‘묻지마 범죄’였다면,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서 동일한 방식으로 어깨접촉이 일어났던 다른 남성들에게는 그의 공격성이 발현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가해자의 조현병 병력과는 별개로 이번 사건은 한국사회에 만연한 여성혐오의 단면을 드러내는 사건이다. 이번 사건을 가해자의 조현병이라는 개인적 질환으로 그 범죄원인을 축소시키는 것은 이와 유사한 수많은 범죄현상들이 뿌리로 삼고 있는 여성혐오사회의 폭력의 구조를 철저히 은폐하고자 하는 것이다. 일면식도 없는 여성을 주 대상으로 한 폭행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범행동기나 범죄대상을 특정할 수조차 없는, ‘묻지마 범죄’로 규정하는 것은 엄연한 여성 피해자를 지우는 행위이며 가해자의 고의성을 희석하는 판단이다. 우리 사회가 ‘묻지마 범죄’ 사건에서 결코 묻고 있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과거부터 지금까지 이와 유사한 불특정 여성 대상 폭력이 반복되고 있다면, 그러한 가해자들의 범행이 지속적으로 발현되고 용인될 수 있었던 그 사회 구조적 배경과 차별에 대해서 우리는 반드시 되물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여성 대상의 유사한 범죄들은 범행동기와 원인조차 분석불가능하고 제대로 된 해법이 없는 ‘묻지마 범죄’로 파편화되어 또다시 여성들을 향한 폭력들을 방조·강화하는 치명적인 부메랑으로 작용할 것이다.


게다가 사법부는 가해자의 첫 번째 긴급체포 과정이 위법하다며 구속영장을 기각하며 가해자의 집을 ‘침해 불가한 성채’로 표현하였다. 또한, 구속 영장이 두 번째로 기각될 때까지 사법부는 정작 여성시민의 생명권과 존엄권의 ‘성채’인 ‘신체’ 폭행 재범의 부분을 포함한 피해자의 권리와 안전에는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가해자의 안위와 존엄권을 ‘성채’로 표현하고 공감할 줄 아는 사법부가 구속영장 기각을 통해 피해자 여성과 더불어 불특정 여성들의 성채인 신체와 안전권의 위협 가능성을 경시하는 것은 명백히 가해자 중심, 남성 중심적인 행태이다. 가해자의 보복행위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도록 하는 실질적인 신변 안전조치의 첫 단계인 가해자의 구속이, 특히나 피해자가 여성일 경우 즉각 진행되지 못하는 것을 연이어 목격하면서, 사법 체계에 대한 여성들의 불만과 불신은 점점 커지고 있다.


사법부는 2차 피해와 가해자의 재범을 방치하는 안이한 결정을 철저히 반성하고, 가해자의 강제입원 조치와 더불어 피해 여성들의 신변 보호와 같은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여야 한다. 사법부가 해당 범죄를 가해자 개인의 정신질환 문제라며 원인을 축소하고 범죄동기를 해석 불가능한 것으로 치부하는 것은, 해당 범죄의 뿌리인 여성혐오 사회에 대한 비판과 대처 자체를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행태이다. 재판부의 해당 사건의 가해자 불구속 결정은 성인지 감수성이 떨어질 뿐 아니라 국민의 인식 수준과도 상당히 거리가 있는 결정이다.


더는 ‘묻지마 범죄’의 이름으로 우리 사회에 만연한 여성혐오범죄를 덮지 않아야 한다. 사법부는 반복되는 여성혐오 범죄를 중대하고 엄연한 사실로 겸허히 받아들이고, 이에 대한 실효성 있는 대응책을 마련해야할 것이다.




2020년 6월 23일


여성의당 정책위원회(의장 윤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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